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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차 추천독서/발해고

발해고 // 유득공

by 오쏠의 도전기 2020. 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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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월 중순부터 읽기시작한 고전책!

 방학을 맞은 아이들도 챙겨야하고 명절에 더더욱 바빠진 가게일로 목표한 1월말까지의 독파약속을 이룰수없었다.

녹녹하지만은 않을거라는 것을 알았지만 휴~

변경이겠지만 아직 시간을 적절히 분배하기 쉽지않네 .그래도 늦지않았음을 다시 채근해본다

《 《 《 《   차례  》 》 》 》 》

 

 

유득공의 발해고

 

 

1.왕에 관한 고찰

2. 신하에 관한 고찰

3. 지리에 관한 고찰

4. 관청 및 관직에 관한 고찰

5. 의식 및 복장에 관한 고찰

6. 물산에 관한 고찰

7. 국어에 관한 고찰

8. 국사에 관한 고찰

9. 후예국가에 관한 고찰

                                              《 《 《 《  유득공의 역사인식  》 》 》 》 》

『 삼국사기 』『나 『삼국유사 『에 전적으로 의존하였던 종래의 견해들에 대해 대단히 비판적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고려 승려가 지은 고기(古記)만 보고 여러 사서들을 다시 검토하지않아서 3한 이전의 역사를 알지 못하게 된 것은 탄식할 일이다 ." 고 하였고 "동사( 東史 )에 서술된 것은 황당한 것들이고 고기도 모두 믿기 어려우니, 중국 역대의 사서들을 두루살펴 근거로 삼는 것만 못하다" 고 지적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그가 중국 사서들을 두루 섭렵하였던 자신감에서 표출된 것이었다.

그는 일차적 사료인 우리 나라 금석문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부여에 남겨진 소정방과 유인원의 비를  『이십일도회고시 』의 한주제로 삼았고, 연행하였을 때에 이들 탁본을 나방에게 선물로 주기도 하였다.그리고, 1798년에는 신라와 고려의 비문8편을 판독하고, 그 내용을 분석하였으며, 이들을 시제로 삼았다. 특히 탁본을 보고 스스로 황초령 순수비 비문을 판독해내어 , 이 비가 진흥왕 29년(568년) 에 만들어진 것이고, 승려를 도인이라 한 것은 6조시대의 풍습이며, 진흥왕이 이 곳까지 개척하였다는 사실이 『 삼국사기 』 에 누락되어 있다고 적시한 것은 주목된다.

우리의 풍습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였다 .최초로 세시풍속을 기록한 『경도잡지 』를 저술하였 뿐 아니라 ,중국의 항이 고구려의 온돌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혔고, 옥저의 민며느리 제도에 대해서도 언급하였으며, 단오절에 쑥떡을 해먹는 풍습이 발해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하였다. 이렇게 우리 것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중국 시에 대한 일방적인 모방에서 벗어난 그의 문학론과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서, 이것이 바로 우리 역사에 대한 애착으로까지 연결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가 인식하였던 한국사 쳬계는 한백겸의 영향이 컸던 것을 보여준다.한강을 경계로 하여 북쪽과 남쪽의 역사를 구분한 것은 그의 영향이 분명하다 .

『 이십일도회고시 』 를 쓸 때만 하여도 주게가 한반도 안에만 국한되었고, 더구나 한강 이남의 역사에 중점이 두어지고 있는 것은 발견할 수 있다. 반면에 『발해고 』와 『사군지 』는 한강 이북의 역사로 중심이 기울면서 북방의 역사에 중점을 둔 역사서이다. 따라서 그간에 역사 인식에서 커다란 변화가 있었음을 짐작할수 있다.

그가 북방의 역사에 주목하게 된 것은 나약해져버린 조선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각과도 무관하지 않다. 『발해고 』 서문에서 우리 역사의 무대였던 만주를 잃어버린 데에 대해 통탄하였고, 『사군지 』 서문에서는 조선의 '숭문억무' 정책을 비판하면서 북방 영토를 강건하고 상무적인 기질의 고향으로 생각하였다.

여기까지만 읽어도 유득공은 아버지쪽의 글쓰기 내력과 외가쪽의 무인의 기질이 함께 어우러져 이모든 역사관이 이루어진듯하다. 글쏨씨도 뛰어날뿐아니라 자신이 옮다고 느끼는 것에 대한 인식의 빠른 전환과 추진력이 그렇게 보인다.

그의 저술은 네 가지로 분류해볼수 있다

첫째는 자신의 시문들을 모은 것이거나 이와 관련된 것이다. 여기에는 자신이 지은 시문을 모아 놓은 『영재집 』 과 기자에서 후백제에 이르는 우리 나라 시들을 엮어 놓은 『동시맹(1772년)』 이 있다

둘째는 시문에도 속하는 것이기는 하지만,직접적으로 연행과 관련된 것들이다. 『 중주십일가시선 』 , 『병세집 (1796년) 』 ,『난양록 』  『연대재유록 』 『금대억어 』   『후운록 』에 수록되어 있다.

셋째는 신변 잡사와 단상들을 연대순으로 써 내려간 『고운당필기 』 와 우리나라 세시풍속을 최초로 기록한『 경도잡지 』가 있다

넷째는 『 이십일도회고시 』 , 『발해고 』 , 『사군지 』와 같은 역사서이다.


                                                             《《《《《    유득공     》》》》》
자는 혜풍 또는혜보이고, 호는 영재이다. 1748년에 서얼의 신분으로 태어나 1807년 세상을 떠났다.정조 때 규장각 검서관을 시작으로20여년간의 관직생활을 거쳐 만년에 정3품까지 올랐다.북학파의 한 사람으로 박지원,이덕무,박제가 등과 교유하였고 중국 이외에 많은 나라에 관심을 기울인 끝에
『 발해고 』와『 사군지 』 를 저술하였다. 이외에도『 영재집 』『 이십일도회고시 』
『 동시맹 』 『 난양록 』『 경도잡지』등의 저술이있다.

저자의 서문은 1784년 윤3월에 지은것으로서, 여기에는 이 책을 지은경위와 목적이 잘 드러나 있다. 그가 이 책을 짓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검서관으로서 규장각에 소장된 책들을 많이 읽을 수 있었던 데에 있다. 박제가가 서문에서 암시하고 있듯이 유득공이 『 이십일도회고시  』 를 쓸 적에는 한반도 안의 역사에만 국한되었고, 여기서 나아가 한반도 밖으로 시야가 확대되어 나타난 것이 『 발해고 』 이다. 그의 나이 31세에서 37세 사이에 의식의 변화가 있었던 것이다.

이 책에는 모두 22종의책이 인용되었다. 이 중에서 주목되는 것은 일본의 역사서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일본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그로서는 이들의 역사서를 인용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겠지만, 일본 자료를 토대로 『 국서고 』라는 독립된 항목을 설정할정도로 자료 이용의 범위가 확대된 사실도 역시 평가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그는 사학사에서 확고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도 서문에 나타난 혁신적인 발해관 때문이다. 이미 잘 알려진 바대로 그는 여기서 고려가 발해까지 우리 역사에 넣어 '남북국사'를 썼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고 서두를 꺼낸 뒤, 발해를 세운 대씨가 고구려인이고 발해가 차지하고 있던 땅도 고구려 땅이었다고 하여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강조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남북국시대론' 의 효시를 이루는 것이다.

그는 한 걸음 나아가 발해사를 우리 역사 속에 넣을 것을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발해사를 나름대로 체계화시키고자 함으로써 , 그 자신을 한국사학사 한가운데에 우뚝 세우는 데에 그 누구도 주저하지 않도록 만들었다.

역사가로서 그의 인식은 초기에 남방 중심의 역사 인식에서 시작하여 나중에 북방 중심의 역사 인식으로 변모해갔으나, 그 결과 나타난 『 발해고 』와  『 사군지 』 는 그로 하여금 한국사학사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기게 하였다.                   그는 발해의 옛 땅을 회복하여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 발해고 』 를 저술하였고 , 북방 역사의 연원을 밝혀보고자 하는 의도에서  『 사군지  』 를 저술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연구는 나중에 정약용, 한치윤등의 연구 업적이 나올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였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특히 발해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자 하였던 그의 노력은 더더욱 높이 평가받아야 마땅할 것이다.

                                                <<<<< 발해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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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멸망하자 당나라가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이를 지키게하였다. 그러나, 중국에서 멀리 떨어져서 다스리기가 어려워 많은 고구려인들을 양자강과 회수로 이주시킨 결과, 그곳은 빈 땅이 되어 버렸다. 여기서 발해가 점차 세력을 키워 수백 년을 유지하다가 거란에게 멸망당하였다.                                                                                            무릇 숙신 이후로 물길이라 불리기도 하였고, 말갈이라 불리기도 하였으며,발해라 불리기도 하였으나, 그 부락의 흥망성쇠를 논할 만한 자료는 충분하지 않다.                                                                                                      그렇지만 , 사나운 우두머리들이 체력과 호기를 믿고 산림 속에  집결하여 서로 다투어 빼았으며 방자히 뛰어 돌아다닌 사실은 충분히 생각해낼 수 있으므로, 그들이 얻거나 잃은 자취와 영토의 변천 및 산천의 지세에 대해서는 국가의 큰 일을 꾀하는 사람들이 마땅히 헤아려 밝혀야 할 것 이다.                                                                                                                  

공께서 정력을 쏟아 고증하고 연구하여 이 책을 지은 것은, 본디 신기한 것을 좋아하는 성정에서 비롯된 것이지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 사람들이 자세히 검토하여 국가를 세워 운영해갔던 뜻을 이해하게 된다면, 이 세상을 다스리는 정책에 도움이 되는 것이 적지 않을 터인데, 이를 알아주는 사람이 극히 적어 함부로 버려지게 되니, 실로 애석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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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부녀자가 보고 듣는 것은 용마루를 넘지 못하고, 어린아이가 노는 곳은 겨우 문지방에 미칠 뿐이니. 담장 밖의 일을 말하기가 어려운 법이다. 우리 나라 선비들이 신라 영토 안에서 태어나 그 바깥의 일에 대해서는 눈과 귀를 틀어막아 버리고, 또한 한나라와 당나라, 송나라, 명나라의 흥망과 전쟁에 관한 일도 알지 못하니, 어찌 발해의 역사를 알수 있겠는가?                                                                                                                                                     내친구 유해풍은 박식하고 시를 잘지으며 과거의 일도 상세히 알고 있으므로, 이미  『 이십일도시주』 를 지어 우리 나라의 볼 만한 것들을 자세히 밝혀 놓았다.                                                                                                     더 나아가  『발해고 』1권을 지어서 인물, 군현, 황의 계보,연혁을 아주 미세한 것까지 세세히 엮어서 종합해 놓았으니, 가히 기쁜 일이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고려 왕씨가 고구려 영토를 회복하지 못하였음을 한탄하는 것이니, 왕씨가 옛 땅을 회복하지 못함으로써 계림과 낙랑의 터전이 마침내 애매모호해지고 스스로 천하와 단절되어 버렸던 것이다.       이에 내가 전에 검토한 바와 서로 부합되는 것을 알게 되었고, 천하의 형세를 살피고 황도와 패도의 지략을 엿볼 수 있는 유혜풍의 재능에 감탄하였다.

박제가와는 허심탄회하게 발해역사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을거라는 느낌이든다

마치 자신의 책을 쓰는 것처럼 충분히 공감하고 울분을 토하는 내용이라 감동이 느껴지는 서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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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을 위하여 계책을 세우는 사람이 급히 발해사를 써서, 이를 가지고 " 왜 우리 발해 땅을 돌려주지 않는가? 발해 땅은 바로 고구려 땅이다" 고 여진족을 꾸짖은 뒤에 장군 한 명을 보내서 그 땅을 거두어 오게 하였다면, 토문강 북쪽의 땅을 소유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이를 가지고 " 왜 우리 발해 땅을 돌려주지 않는가? 발해 땅은 바로 고구려 땅이다"고 거란족을 꾸짖은 뒤에 장군 한 명을 보내서 그 땅을 거두어 오게 하였다면 , 압록강 서쪽의 땅을 소유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끝내 발해사를 쓰지 않아서 토문강 북쪽과 압록강 서쪽이 누구의 땅인지 알지 못하게 되어, 여진족을 꾸짖으려 해도 할 말이 없고, 거란족을 꾸짖으려 해도 할 말이 없게 되었다.                                                                    고려가 마침내 약한 나라가 된 것은 발해 땅을 얻지 못하였기 때문이니, 크게 한탄할 일이다.

1. 왕에 관한 고찰                                                                                                                                ① 진국공

☆ 진국공은 성이 대씨이고 이름은  걸걸중상으로속말말갈인이었다. 속말말갈은 고구려에 신하가 되었던 자들이다.       어떤 사람은 대씨가 대정씨에서 나왔고, 동이족에 대씨가 있게 된 것은 대련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당나라 고종 총장 원년(668)에 고구려가 멸망하자, 걸걸중상은 아들 대조영과 함께 집안 식솔을 이끌고 영주로  옮겨와 사리라 칭하였다. 사리란 것은 부락의 벼슬아치를 가리키는 거란말이다.                                                            거란족인 송막도독 이진충관 귀성주자사 손만영이 당나라에 반기를 들어 영주를 함락시키고 도독 조문홰를 죽였다. 이에 걸걸중상이 두려위하여 말갈 추장 걸사비우 및 고구려 유민과 함께 동쪽으로 요하를 건너 태백산 동북 지역을 근거지로 삼았고, 오루하에 의지하여 성을 쌓고 수비를 굳건히 하였다. 측천무후가 걸걸중상을 진국공으로 봉하고, 걸사비우를 허국공으로 봉하였다.

②고왕

고왕의 이름은 조영으로 진국공의 아들이다. 일찍이 고구려 장수가 되었는데, 아주 용맹스러웠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 하였다. 진국공이 사망하고 걸사비우가 패하여 죽자 대조영은 이를 피하여 도망하였다. 이해고가 그를 뒤쫒아 천문령을 넘자, 대조영이 고구려와 말갈 병사를 이끌고 크게 격파하여 이해고는 겨우 몸만 빼서 탈출하였다. 대조영이 걸사비우의 무리를 병합하여 읍루족이 살았던 동모산을 거점으로 삼으니 말갈과 고구려 유민들이 모두 그에게 돌아갔다. 마침내 돌궐에 사신을 보내어 외교를 맺고, 부여 ㆍ옥저 ㆍ고조선ㆍ 변한 등 바다 북쪽의 10여국을 정복하였다.                      현종 선천 2년에 낭장최흔을 보내서 고왕을 좌효위대장군 ㆍ 발해군왕으로 책봉하였고, 그가 통솔하는 영토를 홀한주로 삼아 홀한주도독에 임명하였다. 이때부터 말갈이란 칭호를 버리고 오로지 발해라고만 부르게 되었다.

③ 무왕

무왕의 이름은 무예로 고왕의 아들인데, 처음에 계루군왕으로 봉해졌었다. 개원7년 6월 정묘일에 당나라가 좌감문솔 오사겸을 임시로 홀려경의 직책에 임명한뒤, 발해에 가서 조문하고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이때에 무왕을 좌효휘대장군  ㆍ홀한주도독ㆍ  발해군왕으로 책봉하였다.                                                                                                왕은 인안이란 연호를 쓰고, 영토를 개척하였다. 풍속에 따라서 관 ㆍ 역을 두지 않았고, 곳곳에 촌락을 두었다. 그 다음은 자사, 그 아래는 수령이라 하였다. 동북의 오랑캐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신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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